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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태순의 단상 / 헤어질 용기 외 1편


박태순 / 디지털 크리에이터 / 한국공론포럼 상임대표


 

헤어질 용기

 

또 한 인간이 사랑이란 이름으로 살해당했다.

만남은 쉽고 헤어짐은 어렵다. 왜냐하면, 만남을 통해 타자가 내 안 어딘가에 들어앉기 때문이다. 헤어짐의 고통이 크기에 누구나 이를 회피하고 싶어 한다. 인지상정이다. 특히, 연인 관계의 경우, 상대가 우리 자신의 존재를 인식하고 느끼는 핵심적인 영역에 들어앉기 때문에 그 고통은 더 클 수밖에 없다. 자신과 타자가 뒤섞여서 구분이 쉽지 않게 되고, 타자와 헤어진다는 것은 곧 자신을 잃는 고통에 휩싸이는 이유이다. 상대와 분리 대신, 극단적인 경우엔 자신을 없애거나 상대를 제거하는 쪽을 택한다. 자살과 치정(癡情) 살인이 많은 이유다.

 

그런데도, 우리는 사람이기에 아무리 내 머릿속, 몸속에 깊이 들어와 있는 존재라도, 내가 아님을, 내가 될 수 없음을 인지하고 느낄 수 있어야 한다. 만날 때가 있으면 헤어질 때도 있고, 자신뿐 아니라 상대에게도 만날 자유가 있으면 헤어질 자유가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자신이 이해하든 그렇지 못하든, 어떤 이유로든, 관계가 변하여 상대가 자신에게서 멀어지려 할 때, 자신으로부터 분리되는 고통을 감내하고, 상대의 자유를 인정해야 한다. 상대의 결정이 내 고통에 우선하는 것이다. 헤어질 용기가 필요하다.

 

그 용기는 근본적으로 상대가 나의 욕망을 채워주는 대상이 아니라, 상대 역시 나를 만날 수 있는 자유와 헤어짐을 결정할 수 있는 자유를 가진 존재, 자기 결정의 주체임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럴 때라야, 헤어질 시간이 다가왔을 때, 상대에게 내 안에 들어와, 얼마나 행복했는지, 얼마나 풍성했는지 감사하고 상대의 앞날을 축복할 수 있는 것이다. 이별이 필요한 시점에, 헤어질 용기가 필요한 시간에, 상대의 헤어질 자유를 인정하고 존중하고, 그간의 관계에 대해 감사를 말해야 할 시점에, 소유물처럼 상대에게 집착하고, 억압하고, 자유를 인정하는 대신 상대를 제거하는 것은 헤어질 용기를 갖지 못한 미숙함의 극치다.

공부든, 출세든, 심지어는 연인조차도 마음만 먹으면 소유할 수 있다고 확신하는 물신(物神)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노예가 되어 버린, 인간의 탈을 쓴 어떤 영리한 ‘무엇’의 모습을 지켜봐야 하는 것이 슬프다.



겸손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

 

작고하신 인문학자 홍세화 선생은 한국인들은 어려서부터 나이 들어까지 도구적 삶에 빠져 사느라, '사고'하지 못한다고 개탄했다. 사고(思考)하지 못하니, 회의(懷疑)할 수 없고, 회의할 수 없으니, 변화를 수용할 수 없어, 궁극적으로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이다.

배가 밖으로 나온 자유인의 삶을 갈망하지만, 이게 갈망처럼 쉽지 않다. 현상을 보고 이해가 되지 않거나, 오래 묵은 질문과 알고 싶은 갈급함에 이 책 저 책을 뒤져보지만, 깨달음은 고사하고, 저자의 의도조차 깨닫지 못할 때가 허다하다.

결국, 모든 책은 실마리는 줄 수 있을지언정, 결국, 깨달음은 사고하는 내 역량에 달렸다. 나이 들수록 궁금하고 알고 싶은 것은 점점 많아지고, 더욱 명철해지고 싶은 욕망은 커지지만, 나 역시 이 시대의 소산인 까닭인가, 날이 갈수록 '사유(思惟) 능력'의 한계와 저급함에 자책하지 않을 수 없다.

홍세화 선생의 마지막 말씀은 '겸손하게 사세요'였다 한다. 끝없이 자신의 한계와 싸우며 자유를 갈망한 이만이 얻을 수 있는 삶의 태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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