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다니엘 블레이크
삭막한 세상 앞에 인간의 가슴으로 맞선 늙은 영웅의 이야기

영화의 시작과 함께 깜깜한 화면 위로 자막이 흐른다. 질병 수당 지급 자격을 확인하기 위해 당국에서 파견한 의료전문가의 질문과 불만에 가득한 답변자의 대화만이 어두운 화면 가득 이어진다. 질문은 격식에 맞춰 정중하게 이뤄지고 있는 듯 보이지만 내용은 헛웃음을 치게 만드는 것들로 채워져 있다. 질문을 받는 사람은 자신의 심장병에 관해 얘기하고 싶어 하지만 질문의 내용은 그와는 별 상관이 없어 보이는 것들뿐이다.
전화기의 버튼을 누를 수 있느냐? 자명종을 맞출 수 있느냐……. 급기야 질문을 받던 다니엘은 자제력을 잃고 폭발한다. 당신 의료전문가 맞소? 난 나의 심장마비에 관해 얘기하고 싶소.
평생을 성실하게 목수로 살아가던 다니엘은 지병인 심장병이 악화하여 일을 계속해나갈 수 없는 딱한 처지가 된다. 당장 생계가 막막해진 다니엘은 질병 수당을 신청하지만 석연찮은 이유로 기각을 당하게 되고 이에 대한 항고와 구직수당을 신청하지만 고용센터의 복잡하고 관료적인 절차 때문에 번번이 고전을 면치 못하고 좌절한다.
그러던 어느 날 다니엘은 고용센터에서 두 아이와 함께 런던에서 뉴캐슬로 이주한 싱글맘 케이티를 만나게 되고 그곳에서 자신처럼 이해할 수 없는 이유로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있던 케이티를 위해 싸워주면서 서로 위로가 되는 이웃이 된다.
다니엘이 케이티의 가족을 위해 도움을 주는 방식은 지극히 아날로그적이다. 나무를 깎아 아이에게 모빌을 만들어주고, 공구함을 가져와 집수리를 도와주고, 창문에 뽁뽁이를 붙여 찬 바람을 막아주고, 양초를 이용해 냉기 가득한 방안을 덥히는 방법을 알려준다.
다니엘과 케이티, 이들은 국가의 복지시스템 안에서 보호받지 못하는 이들을 대변하고 있는 인물이다. 평생을 아날로그 세대로 살아온 다니엘에게 국가는 인터넷을 통해 디지털 문서를 제출해 자신의 무능함을 입증하라고 요구한다. 다니엘에게는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케이티 또한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두 아이를 잘 키우고 싶어 하지만 모든 여건이 이를 허락하지 않는다. 다니엘의 안내로 식료품지원소를 찾은 케이티가 진열대 앞에서 통조림의 뚜껑을 벗겨 허겁지겁 먹는 모습은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을 보여준다. 자신의 그런 모습에 자신도 당황하며 울먹이는 케이티에게 다니엘은 너의 잘못이 아니다. 넌 최선을 다했다며 위로한다.
이 영화의 곳곳에는 사람을 시스템 속에 욱여넣고 복종시키려는 체제의 검은 속내가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반면에 소외된 사람들이 서로 의지함으로써 스스로 자존심을 지키고자 하는 눈물겨운 위로와 격려, 그리고 그들의 인간다운 삶을 지지하고 돕고자 하는 많은 이웃들의 온정과 연대감 또한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감독은 그런 모습을 선전, 선동의 웅변적 방식이 아니라 자신의 위치에서 이웃을 살피고 서로서로 응원하는 일상의 모습으로 표현한다. 영화는 그런 따뜻한 시선이야말로 진정한 혁명을 이뤄내는 방식이 아니겠느냐고 관객에게 웅변하는 듯 보인다.
켄 로치 감독은 <나, 다니엘 블레이크>로 칸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 후 “우리는 희망의 메시지를 사람들에게 보여줘야 한다. 다른 세상이 가능하다고 말해야 한다”라는 가슴 뭉클한 수상 소감을 전하며 박수갈채를 받았다. 앞서 진행된 기자회견에서는 “사람들에게 ‘가난은 너의 잘못이다’라고 말하는 우리의 잔인함이 문제이다.”라는 날 선 비판으로 세간의 주목을 받기도 했다. BBC에서 TV 다큐멘터리 작업을 시작으로 방송과 영화 두 곳을 부지런히 오가며 다소 거칠고 불편한 사회, 정치적인 주제를 다루어 온 켄 로치 감독은 자기 목소리를 내기에는 역부족인 약자들 편에서 관찰자로 때론 대변자로 세상을 향한 일침을 영화에 담아내고 있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
삭막한 세상 앞에 인간의 가슴으로 맞선 늙은 영웅의 이야기
영화의 시작과 함께 깜깜한 화면 위로 자막이 흐른다. 질병 수당 지급 자격을 확인하기 위해 당국에서 파견한 의료전문가의 질문과 불만에 가득한 답변자의 대화만이 어두운 화면 가득 이어진다. 질문은 격식에 맞춰 정중하게 이뤄지고 있는 듯 보이지만 내용은 헛웃음을 치게 만드는 것들로 채워져 있다. 질문을 받는 사람은 자신의 심장병에 관해 얘기하고 싶어 하지만 질문의 내용은 그와는 별 상관이 없어 보이는 것들뿐이다.
전화기의 버튼을 누를 수 있느냐? 자명종을 맞출 수 있느냐……. 급기야 질문을 받던 다니엘은 자제력을 잃고 폭발한다. 당신 의료전문가 맞소? 난 나의 심장마비에 관해 얘기하고 싶소.
평생을 성실하게 목수로 살아가던 다니엘은 지병인 심장병이 악화하여 일을 계속해나갈 수 없는 딱한 처지가 된다. 당장 생계가 막막해진 다니엘은 질병 수당을 신청하지만 석연찮은 이유로 기각을 당하게 되고 이에 대한 항고와 구직수당을 신청하지만 고용센터의 복잡하고 관료적인 절차 때문에 번번이 고전을 면치 못하고 좌절한다.
그러던 어느 날 다니엘은 고용센터에서 두 아이와 함께 런던에서 뉴캐슬로 이주한 싱글맘 케이티를 만나게 되고 그곳에서 자신처럼 이해할 수 없는 이유로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있던 케이티를 위해 싸워주면서 서로 위로가 되는 이웃이 된다.
다니엘이 케이티의 가족을 위해 도움을 주는 방식은 지극히 아날로그적이다. 나무를 깎아 아이에게 모빌을 만들어주고, 공구함을 가져와 집수리를 도와주고, 창문에 뽁뽁이를 붙여 찬 바람을 막아주고, 양초를 이용해 냉기 가득한 방안을 덥히는 방법을 알려준다.
다니엘과 케이티, 이들은 국가의 복지시스템 안에서 보호받지 못하는 이들을 대변하고 있는 인물이다. 평생을 아날로그 세대로 살아온 다니엘에게 국가는 인터넷을 통해 디지털 문서를 제출해 자신의 무능함을 입증하라고 요구한다. 다니엘에게는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케이티 또한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두 아이를 잘 키우고 싶어 하지만 모든 여건이 이를 허락하지 않는다. 다니엘의 안내로 식료품지원소를 찾은 케이티가 진열대 앞에서 통조림의 뚜껑을 벗겨 허겁지겁 먹는 모습은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을 보여준다. 자신의 그런 모습에 자신도 당황하며 울먹이는 케이티에게 다니엘은 너의 잘못이 아니다. 넌 최선을 다했다며 위로한다.
이 영화의 곳곳에는 사람을 시스템 속에 욱여넣고 복종시키려는 체제의 검은 속내가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반면에 소외된 사람들이 서로 의지함으로써 스스로 자존심을 지키고자 하는 눈물겨운 위로와 격려, 그리고 그들의 인간다운 삶을 지지하고 돕고자 하는 많은 이웃들의 온정과 연대감 또한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감독은 그런 모습을 선전, 선동의 웅변적 방식이 아니라 자신의 위치에서 이웃을 살피고 서로서로 응원하는 일상의 모습으로 표현한다. 영화는 그런 따뜻한 시선이야말로 진정한 혁명을 이뤄내는 방식이 아니겠느냐고 관객에게 웅변하는 듯 보인다.
켄 로치 감독은 <나, 다니엘 블레이크>로 칸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 후 “우리는 희망의 메시지를 사람들에게 보여줘야 한다. 다른 세상이 가능하다고 말해야 한다”라는 가슴 뭉클한 수상 소감을 전하며 박수갈채를 받았다. 앞서 진행된 기자회견에서는 “사람들에게 ‘가난은 너의 잘못이다’라고 말하는 우리의 잔인함이 문제이다.”라는 날 선 비판으로 세간의 주목을 받기도 했다. BBC에서 TV 다큐멘터리 작업을 시작으로 방송과 영화 두 곳을 부지런히 오가며 다소 거칠고 불편한 사회, 정치적인 주제를 다루어 온 켄 로치 감독은 자기 목소리를 내기에는 역부족인 약자들 편에서 관찰자로 때론 대변자로 세상을 향한 일침을 영화에 담아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