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둑맞은 집중력
요한 하리 지음. 김하현 옮김. 어크로스 출판
나는 아이들을 향해 소리 질렀다. (가정 또는 학교) 폭력이었다. 길고 긴 대화의 터널에서 결론이 나지 않는 것이 두려웠다. 완강한 거부의 반복에 지쳤다. 갈등의 해결은 위계를 이용한 폭력밖에 없음을 시인한 꼴이다. 비참했다. 상위로 손을 구르며 소리 지른 내용은 소박하고 단출했다. “두 시간 반이 넘으면 뇌를 좀먹게 될 거라고”, “평생을 멍청하게 살고 싶어? 아니면 손을 뗄 줄 알아야지. 바보야?”
나는 아이들에게 (내 기준으로) 넉넉하게 하루 두 시간 반을 제안했던 거였다. 두 아이는 그런 짧은 시간제한은 “말도 안 된다”고 했다.
나의 ‘말도 안 되’는 주장은 과학적(?) 근거를 기반으로 한 것이었다. 이 책이 아니라 다른 책이었다. 제목이 생각나지 않지만, 스마트폰이 삶을 좀먹고 있으며 일정 시간 이상 사용하게 되면 뇌 기능을 저하한다는 내용을 골자로 하고 있었다. 본능적으로 인식하고 있는 내용이었다. 내가 많은 시간을 그것에(?) 빼앗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운동이나 독서 등 건전한 활동을 갉아먹는 가장 큰 악귀가 그것이라고 믿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나의 장면이 떠올랐다. 무서운 영화를 봤을 때의 이미지처럼 떠오르곤 한다. 1년에 한두 번 ‘나의 고향’ 서울에 다녀올 일이 있다. 20년 가까운 내외기간이 있었기에 방문할 때 마다 무척 생소한 느낌이다. 지금 사는 진안에서의 수천 배의 인구밀도를 거리에서 경험하곤 하는 것도 하나다. 절정은 대중교통을 이용할 때이다. 그 사람들을 압축해 욱여넣은 곳이 지하철이나 버스였다. 몸이 부대끼고 끼이는 것은 오래전에도 경험한 바 있었다. 오히려 충격은 매우 비현실적인 장면 때문이었다. 모두가 무언가에 정신을 빼앗기고 있었다. 좌석에 앉은 이들뿐 아니라 서 있는 사람들도 한 손은 손잡이를 잡고 나머지 손에 핸드폰을 잡고 액정화면에 고개를 핸드폰에 묻고 있었다. 나는 황급히 고개를 좌우로 돌려 둘러보았다. 없다. 객차 안 내 시야 반경에서는 그냥 앉아서 졸고 있는 중년여성이 한 명뿐이었다. 나머지는 완벽하게 모두가 마치 월드컵 결승전에 한국이 출전한 시간인 것처럼 손바닥만 한 화면을 향한 눈동자들 뿐이었다.
이 책은 나의 두려움과 경계심에 근거를 더해주었다. 더해 제도와 정책이 어떻게 바뀌어야 하는지 설득력 있는 주장에 맞장구를 치고 싶었다. 큰아들이 다니는 푸른꿈고등학교 교장 선생님의 강력 추천과 그날 저녁에 듣던 팟캐스트 ‘듣똑라’의 소개 내용은 주로 스마트폰 제한에 관한 것이었다. 책은 달랐다. 아니, 훨씬 광범위했다. 이 책은 스마트폰의 해악을 설명하고 행동을 바꾸라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었다. 고전에 등장하는 ‘빅브라더’가 우리를 감시하고 조종한다는 거대한 음모론을 과학적 증언으로 현실임을 증명하는 내용이었다. 이런 환경을 바꾸기 위해선 개인의 생활개선이 아니라 정책변환과 이를 위한 사회운동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기후 위기에 공감하고 계층 간 갈등과 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한 공감과 참여를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이 ‘집중력’을 복원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랬다. 고백하건대 나의 집중력은 아득히 떨어졌다. 한때 온종일 200페이지가 넘는 책을 세 권씩 읽어 재끼던 일은 마치 전생의 일처럼 아득하게 느껴진다. 요즘은 책 한 권 읽기도 어렵다. 한 달이 넘게 걸리는 것은 예삿일이다. 문서를 해석하거나 보고서를 쓰는 일도 그렇다. 컴퓨터 화면을 보며 집중해서 단 몇 분이라도 키보드만 두드리는 일이 드물다. 금방 일어나서 차를 마시고 앉았다가 곁에 있는 잡지를 들척였다가 핸드폰 알림을 들으면 문자만 읽는 것에서 끝나지 않는다. 여러 앱을 열었다가 스크롤 했다가 내려놓는 것은 시간을 훌쩍 넘겨서다. 본래의 일에 집중하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다.
이 글을 쓰는 지금도 마찬가지다. 전화를 두 통 받고, 문자를 확인하고, 무슨 내용인지 카톡 여러 단톡방을 거치고 나서야 다시 돌아왔다. 집중하면 삼십 분이면 끝날 일인데 얼마나 걸릴지 의문스럽다. (글을 마친 뒤에 다시 돌아봐야겠다)
그날 아이들을 향한 큰소리의 외침은 나 자신을 향한 것이기도 했다. 그 물건. 잠자는 시간만 빼면, 아니 자는 시간에도 곁에 있다. 24시간 반경 1미터 이내에 나를 따라다니는 물건은 속옷을 빼면 핸드폰이 유일하다. 이 정도면 핸드폰이 곧 나이며 내가 곧 핸드폰이 아닌가. 그곳에 쌓이는 개인정보와 24시간 연결을 생각하면 그렇기도 하다. 눈과 귀가 있는 전자기기가 스마트폰 아니던가. 소유주인 나와 딱 붙어 연결된 것이 당연하다.
저자는 핸드폰으로부터 독립하기 위해 한적한 시골 마을에 전자기기 일체를 떨쳐두고 3개월간 다녀온 실험을 했다. 그 길다면 긴 시간 동안 멍때리고 불안해하고 방황하던 자기 행동의 실패를 고백한다. 그리고 일정 기간의 디톡스(중독 등에서 벗어나기 위해 독소를 끊어내는 것)가 해결책이 될 수 없음을 깨닫는다. 다이어트의 요요처럼 현실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이유가 있다. 핸드폰이 가지고 있는 강력한 기능 때문이다. 오늘날 무료로 제공되는 대부분의 앱의 수익모델은 무엇일까? 바로 ‘시간’이다. 얼마나 많은 시간 동안 앱에 접속하는 개인의 시간을 늘리느냐가 수익과 직결된다. 유튜브, 페이스북, 틱톡 등의 앱은 무료로 내려받아 접속해 이용한다. 기업은 이익을 광고비로 얻는다. 광고 수익을 높이기 위해서 개인정보를 활용하고 어느 분야와 이슈에 관심을 두는지를 파악하는 것은 한국을 비롯한 많은 국가에서 불법이 아니다. 이를 기업에 제공해 맞춤 광고를 띄운다. 접속 시간을 늘리는 것은 광고비와 비례한다.
접속 시간을 늘리기 위해 알고리즘이 작동한다. 저자는 이 알고리즘이 인류애, 평화, 행복과는 무관하며 혐오와 고통, 악행에 초점을 둔다고 주장한다. 그런 이유로 사용자가 빠져들게 되며 세계 여러 국가의 정치 우경화와 무관하지 않다는 근거를 나열한다.
무한스크롤로 이어지는 피드의 늪에 빠져들면 벗어날 길이 없다. 계속해서 내려가면 알고리즘이 개인에 맞는 추천 글과 영상을 무한대로 잇는다. 위협적인 내용으로 이어지는 피드에 갇히면 위험을 느끼는 것은 당연하다. 위험한 상황에 놓인 뇌는 다른 것에 신경 쓸 겨를이 없다. 당연히 고요한 집중은 불가능해진다.
몰입의 상태가 집중하고 있는 최상의 경지다. 몰입을 통해 무언가에 깊이 빠지고 주변의 상황은 들어오지 않는 상태. 경험이 한 번쯤은 있을 거다. 스포츠 경기가 되었던, 라디오나 핸드폰을 분해하거나 도자기 등 예술작품을 빚어내는 작업이던 말이다. 나는 그런 경험을 해본 지가 언제이던가. 한때 하루 책 서너 권을 읽던 때가 있었다. 2004년 과천도서관으로 출퇴근하던 백수 시절이었다. 도서관에서 온종일 책을 읽고 나면 그 포만감과 행복감에 두근두근 잠을 못 이루던 때였다. 진짜 공부하던 때였다. 한 권의 책이 두세 권의 추천 도서 리스트를 만들면 그렇게 가지를 치고 뻗어나가는 책들을 읽어나가는 방식이었다. 내 삶의 기준과 가치를 세웠던 때이고 당시 1년 동안 400권이 넘는 책을 읽었다.
너무 오래된 느낌이다. 20년이 지난 오늘 나는 더 바빠졌고 빨라졌고 여러 가지 일을 동시에 하고 있다. 덕분에 몰입할 수 없다. 집중력도 훨씬 떨어졌다. 멀티태스킹(동시에 여러 일을 하는 것)이 일상화 되어 음악을 들으면서 문서를 읽거나 작성한다. 여러 화면을 동시에 띄우고 시간을 효율적으로 쓰고 있다고 상상했다. 저자는 말한다. 다 거짓이었다. 멀티태스킹은 주의력을 산만하게 만들며 집중력을 앗아간다. 일의 전환에는 에너지가 필요하다. 뇌는 주의력 전환에 시간이 걸리며 이 때문에 바로 일과 작업에 몰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스마트폰과 거대 기업의 음모에 주의력을 빼앗겨서 그렇지, 책의 주장은 여러 가지로 이어진다. 잠자는 시간을 확보해야 한다거나 오늘날 즉석식 같은 음식이 가지고 있는 첨가물이 뇌에 미치는 영향, 일과 휴식의 분배를 위한 주4일제 실험, 다수가 처한 가족 경제 붕괴 상황, 독서와 딴생각의 중요성, 아이들 놀이문화의 변화가 가져온 문제점 등을 든다. 각 장의 주제만 가지고도 책 한 권 분량은 이야기 나눌 수 있을 것 같다.
책의 결론은 거대하고 담대한 제한이다. 빼앗긴 집중력을 되찾아야 위기의 세계를 함께 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어서 집중력을 되찾아서 함께 손잡고 위기의 지구를 구해보자. ‘도둑맞은 집중력’, 이 책을 읽으며 집중력 회복의 기회를 되찾아보자.
글 / 임준연 고원예산공작소장
도둑맞은 집중력
요한 하리 지음. 김하현 옮김. 어크로스 출판
나는 아이들을 향해 소리 질렀다. (가정 또는 학교) 폭력이었다. 길고 긴 대화의 터널에서 결론이 나지 않는 것이 두려웠다. 완강한 거부의 반복에 지쳤다. 갈등의 해결은 위계를 이용한 폭력밖에 없음을 시인한 꼴이다. 비참했다. 상위로 손을 구르며 소리 지른 내용은 소박하고 단출했다. “두 시간 반이 넘으면 뇌를 좀먹게 될 거라고”, “평생을 멍청하게 살고 싶어? 아니면 손을 뗄 줄 알아야지. 바보야?”
나는 아이들에게 (내 기준으로) 넉넉하게 하루 두 시간 반을 제안했던 거였다. 두 아이는 그런 짧은 시간제한은 “말도 안 된다”고 했다.
나의 ‘말도 안 되’는 주장은 과학적(?) 근거를 기반으로 한 것이었다. 이 책이 아니라 다른 책이었다. 제목이 생각나지 않지만, 스마트폰이 삶을 좀먹고 있으며 일정 시간 이상 사용하게 되면 뇌 기능을 저하한다는 내용을 골자로 하고 있었다. 본능적으로 인식하고 있는 내용이었다. 내가 많은 시간을 그것에(?) 빼앗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운동이나 독서 등 건전한 활동을 갉아먹는 가장 큰 악귀가 그것이라고 믿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나의 장면이 떠올랐다. 무서운 영화를 봤을 때의 이미지처럼 떠오르곤 한다. 1년에 한두 번 ‘나의 고향’ 서울에 다녀올 일이 있다. 20년 가까운 내외기간이 있었기에 방문할 때 마다 무척 생소한 느낌이다. 지금 사는 진안에서의 수천 배의 인구밀도를 거리에서 경험하곤 하는 것도 하나다. 절정은 대중교통을 이용할 때이다. 그 사람들을 압축해 욱여넣은 곳이 지하철이나 버스였다. 몸이 부대끼고 끼이는 것은 오래전에도 경험한 바 있었다. 오히려 충격은 매우 비현실적인 장면 때문이었다. 모두가 무언가에 정신을 빼앗기고 있었다. 좌석에 앉은 이들뿐 아니라 서 있는 사람들도 한 손은 손잡이를 잡고 나머지 손에 핸드폰을 잡고 액정화면에 고개를 핸드폰에 묻고 있었다. 나는 황급히 고개를 좌우로 돌려 둘러보았다. 없다. 객차 안 내 시야 반경에서는 그냥 앉아서 졸고 있는 중년여성이 한 명뿐이었다. 나머지는 완벽하게 모두가 마치 월드컵 결승전에 한국이 출전한 시간인 것처럼 손바닥만 한 화면을 향한 눈동자들 뿐이었다.
이 책은 나의 두려움과 경계심에 근거를 더해주었다. 더해 제도와 정책이 어떻게 바뀌어야 하는지 설득력 있는 주장에 맞장구를 치고 싶었다. 큰아들이 다니는 푸른꿈고등학교 교장 선생님의 강력 추천과 그날 저녁에 듣던 팟캐스트 ‘듣똑라’의 소개 내용은 주로 스마트폰 제한에 관한 것이었다. 책은 달랐다. 아니, 훨씬 광범위했다. 이 책은 스마트폰의 해악을 설명하고 행동을 바꾸라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었다. 고전에 등장하는 ‘빅브라더’가 우리를 감시하고 조종한다는 거대한 음모론을 과학적 증언으로 현실임을 증명하는 내용이었다. 이런 환경을 바꾸기 위해선 개인의 생활개선이 아니라 정책변환과 이를 위한 사회운동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기후 위기에 공감하고 계층 간 갈등과 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한 공감과 참여를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이 ‘집중력’을 복원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랬다. 고백하건대 나의 집중력은 아득히 떨어졌다. 한때 온종일 200페이지가 넘는 책을 세 권씩 읽어 재끼던 일은 마치 전생의 일처럼 아득하게 느껴진다. 요즘은 책 한 권 읽기도 어렵다. 한 달이 넘게 걸리는 것은 예삿일이다. 문서를 해석하거나 보고서를 쓰는 일도 그렇다. 컴퓨터 화면을 보며 집중해서 단 몇 분이라도 키보드만 두드리는 일이 드물다. 금방 일어나서 차를 마시고 앉았다가 곁에 있는 잡지를 들척였다가 핸드폰 알림을 들으면 문자만 읽는 것에서 끝나지 않는다. 여러 앱을 열었다가 스크롤 했다가 내려놓는 것은 시간을 훌쩍 넘겨서다. 본래의 일에 집중하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다.
이 글을 쓰는 지금도 마찬가지다. 전화를 두 통 받고, 문자를 확인하고, 무슨 내용인지 카톡 여러 단톡방을 거치고 나서야 다시 돌아왔다. 집중하면 삼십 분이면 끝날 일인데 얼마나 걸릴지 의문스럽다. (글을 마친 뒤에 다시 돌아봐야겠다)
그날 아이들을 향한 큰소리의 외침은 나 자신을 향한 것이기도 했다. 그 물건. 잠자는 시간만 빼면, 아니 자는 시간에도 곁에 있다. 24시간 반경 1미터 이내에 나를 따라다니는 물건은 속옷을 빼면 핸드폰이 유일하다. 이 정도면 핸드폰이 곧 나이며 내가 곧 핸드폰이 아닌가. 그곳에 쌓이는 개인정보와 24시간 연결을 생각하면 그렇기도 하다. 눈과 귀가 있는 전자기기가 스마트폰 아니던가. 소유주인 나와 딱 붙어 연결된 것이 당연하다.
저자는 핸드폰으로부터 독립하기 위해 한적한 시골 마을에 전자기기 일체를 떨쳐두고 3개월간 다녀온 실험을 했다. 그 길다면 긴 시간 동안 멍때리고 불안해하고 방황하던 자기 행동의 실패를 고백한다. 그리고 일정 기간의 디톡스(중독 등에서 벗어나기 위해 독소를 끊어내는 것)가 해결책이 될 수 없음을 깨닫는다. 다이어트의 요요처럼 현실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이유가 있다. 핸드폰이 가지고 있는 강력한 기능 때문이다. 오늘날 무료로 제공되는 대부분의 앱의 수익모델은 무엇일까? 바로 ‘시간’이다. 얼마나 많은 시간 동안 앱에 접속하는 개인의 시간을 늘리느냐가 수익과 직결된다. 유튜브, 페이스북, 틱톡 등의 앱은 무료로 내려받아 접속해 이용한다. 기업은 이익을 광고비로 얻는다. 광고 수익을 높이기 위해서 개인정보를 활용하고 어느 분야와 이슈에 관심을 두는지를 파악하는 것은 한국을 비롯한 많은 국가에서 불법이 아니다. 이를 기업에 제공해 맞춤 광고를 띄운다. 접속 시간을 늘리는 것은 광고비와 비례한다.
접속 시간을 늘리기 위해 알고리즘이 작동한다. 저자는 이 알고리즘이 인류애, 평화, 행복과는 무관하며 혐오와 고통, 악행에 초점을 둔다고 주장한다. 그런 이유로 사용자가 빠져들게 되며 세계 여러 국가의 정치 우경화와 무관하지 않다는 근거를 나열한다.
무한스크롤로 이어지는 피드의 늪에 빠져들면 벗어날 길이 없다. 계속해서 내려가면 알고리즘이 개인에 맞는 추천 글과 영상을 무한대로 잇는다. 위협적인 내용으로 이어지는 피드에 갇히면 위험을 느끼는 것은 당연하다. 위험한 상황에 놓인 뇌는 다른 것에 신경 쓸 겨를이 없다. 당연히 고요한 집중은 불가능해진다.
몰입의 상태가 집중하고 있는 최상의 경지다. 몰입을 통해 무언가에 깊이 빠지고 주변의 상황은 들어오지 않는 상태. 경험이 한 번쯤은 있을 거다. 스포츠 경기가 되었던, 라디오나 핸드폰을 분해하거나 도자기 등 예술작품을 빚어내는 작업이던 말이다. 나는 그런 경험을 해본 지가 언제이던가. 한때 하루 책 서너 권을 읽던 때가 있었다. 2004년 과천도서관으로 출퇴근하던 백수 시절이었다. 도서관에서 온종일 책을 읽고 나면 그 포만감과 행복감에 두근두근 잠을 못 이루던 때였다. 진짜 공부하던 때였다. 한 권의 책이 두세 권의 추천 도서 리스트를 만들면 그렇게 가지를 치고 뻗어나가는 책들을 읽어나가는 방식이었다. 내 삶의 기준과 가치를 세웠던 때이고 당시 1년 동안 400권이 넘는 책을 읽었다.
너무 오래된 느낌이다. 20년이 지난 오늘 나는 더 바빠졌고 빨라졌고 여러 가지 일을 동시에 하고 있다. 덕분에 몰입할 수 없다. 집중력도 훨씬 떨어졌다. 멀티태스킹(동시에 여러 일을 하는 것)이 일상화 되어 음악을 들으면서 문서를 읽거나 작성한다. 여러 화면을 동시에 띄우고 시간을 효율적으로 쓰고 있다고 상상했다. 저자는 말한다. 다 거짓이었다. 멀티태스킹은 주의력을 산만하게 만들며 집중력을 앗아간다. 일의 전환에는 에너지가 필요하다. 뇌는 주의력 전환에 시간이 걸리며 이 때문에 바로 일과 작업에 몰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스마트폰과 거대 기업의 음모에 주의력을 빼앗겨서 그렇지, 책의 주장은 여러 가지로 이어진다. 잠자는 시간을 확보해야 한다거나 오늘날 즉석식 같은 음식이 가지고 있는 첨가물이 뇌에 미치는 영향, 일과 휴식의 분배를 위한 주4일제 실험, 다수가 처한 가족 경제 붕괴 상황, 독서와 딴생각의 중요성, 아이들 놀이문화의 변화가 가져온 문제점 등을 든다. 각 장의 주제만 가지고도 책 한 권 분량은 이야기 나눌 수 있을 것 같다.
책의 결론은 거대하고 담대한 제한이다. 빼앗긴 집중력을 되찾아야 위기의 세계를 함께 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어서 집중력을 되찾아서 함께 손잡고 위기의 지구를 구해보자. ‘도둑맞은 집중력’, 이 책을 읽으며 집중력 회복의 기회를 되찾아보자.
글 / 임준연 고원예산공작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