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의 농사 여행
글과 사진 / 고석수(타마) <tamakosail0205@gmail.com>
2014년 4월, 나는 전라북도 장수군의 농장에 도착했다. 첫 시골 여행지로 가장 익숙한 전라도를 택했다. 이곳은 부모님이 자란 고향이다. 신생아 시절 나는 전라도 할머니 손에 맡겨졌다. 유년 시절에도 한 달에 한 번씩, 혹은 주말마다 전라도를 찾았다. 부모님은 나를 자연을 듬뿍 맛볼 수 있는 곳에 데려다주었다. 다시 찾은 그날도 봄을 맞은 부모님의 고향엔 새순이 돋아나고 있었다. 노란 산수유꽃, 분홍 매화 향기, 새하얀 별꽃이 세상을 물들이고 있었다. 두릅, 머위, 망초가 싱싱한 향기를 뿜으며 부드러운 땅에서 솟아났다.
장수에서의 첫 일상은 멀칭 비닐을 찢고 감자 싹을 꺼내는 일로 시작했다. 다가올 여름에 무섭게 자랄 잡초를 막기 위해 검정 비닐 멀칭이 감자밭 두둑을 뒤덮고 있었다. 멀칭 비닐은 아직은 일교차가 큰 봄밤에 감자 싹이 어는 것을 막는 인큐베이터 역할도 하고 있었다. 지난달 심어둔 씨감자에서 여린 싹이 불쑥 올라왔다. 나는 검은색 비닐을 5cm가량 찢어냈다. 한낮의 열기를 한숨처럼 토해내며 새 초록의 감자 싹들이 세상을 만났다. 감자잎은 무성히 자라고 감자알은 주렁주렁 매달릴 것이다.
내게 감자는 마트에서 보던 것이 전부였다. 종이상자를 들어 올려 비닐봉지에 무게별로 집어 오는 것이 나와 감자의 추억이었다. 새까만 비닐에 대비되는 새파란 새싹이 힘차게 느껴졌다. 봄의 햇빛은 따뜻했다. 땅 위에 쪼그려 앉아 두둑을 따라 오른쪽으로 이동하며 멀칭 비닐을 찢고 감자 싹을 꺼내는 작업을 했다. 한참 후 지나온 왼쪽을 돌아보면 새싹이 햇살에 빛나고 있었다. 난생처음 하는 작업을 견뎌내는 내가 자랑스러웠다. 감자의 새싹처럼 나를 덮고 있는 멀칭을 찢고 나도 자라고 싶었다.
저는 대학생이고, 온실 속의 화초입니다.
“서울 사람이 여긴 왜 왔나?”
할아버지 한 분이 마을에서 오가는 낯선 청년을 붙들고 묻는다. 대답하기가 애매했다. 전라도가 부모님 고향이라 왔다고 말하지 못했다. 아직 학생인 난 고향을 찾아 귀농을 한것도 아니었다. 이곳이 부모님의 고향은 맞지만 내 고향이 될 수는 없다. 나는 수도권에서 자란 아파트 키즈이고 졸업을 앞둔 대학생이다. 취직을 하기엔 경쟁이 두려웠다. 정확히 말하자면 나는 시골로 도망친 것이다.
나는 온실 속의 화초를 닮았다. 대학교는 안온한 온실이다. 책에서는 정의와 진리를 논하지만, 현실의 나는 부모님 용돈에 기대어 산다. 그런 내가 늘 부끄러웠다. 부드러운 손도 부끄럽고, 창백한 내 얼굴빛도 싫었다. 노동 없이 사는 나를 보고 누군가는 불공평하다고 느낄 것이다. 그럼에도 아버지는 매달 내게 용돈을 보내주셨다. 아버지의 두툼한 팔뚝과 널찍한 등짝에 대비되는 얇고 좁은 나의 몸통도 부끄러웠다.
그러나 세상이 내 안전한 온실을 찢기 시작했다. 이제부터 대학 밖으로 나가야 한다. 졸업하고 취직하고 결혼하고 육아하고 집을 구하고 노후를 준비해야 한다. 그 모든 절차가 난 두려웠다.
난 도시와 안전한 온실을 벗어나 여행을 떠나기로 결정했다. 여행은 나에게 새로운 관계의 형태를 알려주었다. 특히 우프(World Wide Opportunity on Organic Farm)라는 유기농 농장 네트워크는 내게 모험의 세계를 열어주었다. 우프에서 나는 상호호혜적인 관계를 체험했다. 여행자는 노동을 하고 호스트는 숙식을 제공한다. 그러나 이것은 고용자와 노동자의 관계가 아니었다.
농사일이 처음인 풋내기의 손은 놀랄 만큼 느리다. 가위질부터 호미질까지 하나하나 배워갔다. 체험 학습에 온 아이처럼 당근도 심어 보고 토마토에 물도 줬다. 유기농이 가지는 의미도 배웠다. 그렇게 학생이 되기도 했다가 저녁에는 마을의 손님이 되었다. 농부들이 정성스레 밭에서 키운 작물로 요리한 음식을 나눠 먹고 막걸리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눴다. 이런 관계의 형태는 내겐 충격이었다. 나는 여행을 통해 다양하고 새로운 관계의 형태를 발견했다. 이것이 바로 나에게 필요한 것이었다.
흐릿한 기억 속에서 발견한 것
우리는 경쟁 관계에 익숙하다. 입시 생활도 경쟁이고 학교생활도 학점을 따기 위한 경쟁이었고, 내가 앞둔 취직도 다시 경쟁이었다.
장수군 백화골 농장에서 운영하는 제철 꾸러미 제도는 경쟁이 아닌 협력 관계이다. 기계화된 시대에도 농부가 농사를 지으며 입게 될 리스크는 여전히 크다. 가격과 생산량은 여전히 통제할 수 없는 날씨에 맡겨진다. 이때 도시의 회원들은 연회비로 농부의 안정적인 소득을 후원하면서 그 대가로 매달 제철 채소를 제공받는다. 상자에 담긴 채소의 종류와 양은 날씨에 따라 변동된다. 농장의 꾸러미 회원들이 리스크를 나누며 농부를 후원하는 방식은 이미 10년간 이어졌다. 이러한 관계의 경험은 나에게 경쟁이 아닌 협력의 중요성을 깨닫게 했다.
그런데 나는 이것이 새로운 것이 아닌 내 과거의 기억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미 우리 할머니는 더 대담한 관계를 해왔었다. 어릴 적 내게 전라도는 많은 것을 받을 수 있는 곳이었다. 이곳에서는 칭찬도 받고, 음식도 많이 받아먹었다. 비단 가족들에게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할머니는 집을 찾은 손님들과 늘 많은 것을 나눴다. 우리 부모님은 그런 할머니에게 보고 배운 것을 자식인 내게 지금까지도 행동으로 보여주고 있다. 명절이면 집에 들어오는 많은 선물들은 그동안 부모님이 그만큼 많은 것을 사람들과 나눴기 때문이리라. 어릴 적 할머니가 나에게 가르쳐준 건 서로 나누고 함께하는 삶의 가치였다.
일본과 대만의 시골을 가다
나의 시골 여행은 장수를 거쳐 일본으로 이어졌다. 내게 익숙한 것들이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일본의 시골에서도 전라도에서 느낀 관계와 문화를 발견할 수 있었다. 일본의 농장은 협력 시스템을 통해 20년도 넘게 유기농을 유지해 오고 있었다. 또한 우프를 통해 노동력과 숙식을 교환하는 관계 또한 서로 선물을 주는 형태에 가까웠다.
전라도에 이어 도착한 일본 시골 농장에서도 같은 관계를 경험했다. 미소된장국, 낫토, 절임 음식, 다다미방. 낯선 일본 시골의 문화였지만 그 밑으로 흐르는 것은 한국 농촌의 그것과 닮았다.
대만의 농장에서도 같은 관계를 다시 만났다. 그곳에선 어릴 적 우리네 명절과 같은 시간을 보냈다. 시골집은 사촌들과 함께 밤새워 즐겁게 놀 수 있는 곳이었다. 매년 명절마다 부모님이 마련해준 어린이 캠프였다.
내가 지낸 대만의 난아오 농장은 세계 곳곳에서 매년 400여 명의 청년들이 찾는 곳이다. 그들은 함께 농사일을 하고 밥을 지어 먹었다. 그곳에서 만난 중화권 친구들은 언어와 문화가 서툰 나를 챙겨주었다. 농장 일이 끝난 후에는 그들의 집에 가서 함께 놀았다. 대만 시골 여행이 끝나는 날에는 공항까지 마중을 나와 주었다. 다음 명절에 다시 만날 것을 기대하는 마음으로 난 그들을 떠나 한국의 도시로 돌아왔다.
그렇게 여행을 하는 2개월의 시간은 내게 많은 힘을 주었다. 내게 힘을 주는 관계가 무엇인지 명확해졌다. 대가가 아닌 서로 선물을 나누는 삶을 살고 싶었다. 때마침 돌아온 서울에서 새로운 인턴 공고를 발견했다. 대기업 N사가 유기농 설문조사 인턴을 모집한다는 것이었다. 유기농 농장을 여행하고 온 나에게 큰 의미로 다가왔다.
면접 결과는 합격이었다. 전라도 농장에서 선물 받은 사과를 들고 면접을 보고 나니 나는 회사에서 사과 농장을 운영하는 청년으로 기억되었다. 시골 모험은 나를 도시의 대기업으로 인도했다. 나에게 시골은 여전히 여행이고 일탈일 뿐이었다. 도시에서의 삶이 나에겐 익숙하고 안정적이다.
그러나 내 마음 속에서는 무언가 새로운 도전이 꿈틀거렸다. 인턴 사원증을 목에 걸고 출근한 첫날에도 무언가가 다시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새로운 만남을 위해 나는 또다시 준비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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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수에서의 첫 일상은 멀칭 비닐을 찢고 감자 싹을 꺼내는 일로 시작했다. 다가올 여름에 무섭게 자랄 잡초를 막기 위해 검정 비닐 멀칭이 감자밭 두둑을 뒤덮고 있었다. 멀칭 비닐은 아직은 일교차가 큰 봄밤에 감자 싹이 어는 것을 막는 인큐베이터 역할도 하고 있었다. 지난달 심어둔 씨감자에서 여린 싹이 불쑥 올라왔다. 나는 검은색 비닐을 5cm가량 찢어냈다. 한낮의 열기를 한숨처럼 토해내며 새 초록의 감자 싹들이 세상을 만났다. 감자잎은 무성히 자라고 감자알은 주렁주렁 매달릴 것이다.
내게 감자는 마트에서 보던 것이 전부였다. 종이상자를 들어 올려 비닐봉지에 무게별로 집어 오는 것이 나와 감자의 추억이었다. 새까만 비닐에 대비되는 새파란 새싹이 힘차게 느껴졌다. 봄의 햇빛은 따뜻했다. 땅 위에 쪼그려 앉아 두둑을 따라 오른쪽으로 이동하며 멀칭 비닐을 찢고 감자 싹을 꺼내는 작업을 했다. 한참 후 지나온 왼쪽을 돌아보면 새싹이 햇살에 빛나고 있었다. 난생처음 하는 작업을 견뎌내는 내가 자랑스러웠다. 감자의 새싹처럼 나를 덮고 있는 멀칭을 찢고 나도 자라고 싶었다.
저는 대학생이고, 온실 속의 화초입니다.
“서울 사람이 여긴 왜 왔나?”
할아버지 한 분이 마을에서 오가는 낯선 청년을 붙들고 묻는다. 대답하기가 애매했다. 전라도가 부모님 고향이라 왔다고 말하지 못했다. 아직 학생인 난 고향을 찾아 귀농을 한것도 아니었다. 이곳이 부모님의 고향은 맞지만 내 고향이 될 수는 없다. 나는 수도권에서 자란 아파트 키즈이고 졸업을 앞둔 대학생이다. 취직을 하기엔 경쟁이 두려웠다. 정확히 말하자면 나는 시골로 도망친 것이다.
나는 온실 속의 화초를 닮았다. 대학교는 안온한 온실이다. 책에서는 정의와 진리를 논하지만, 현실의 나는 부모님 용돈에 기대어 산다. 그런 내가 늘 부끄러웠다. 부드러운 손도 부끄럽고, 창백한 내 얼굴빛도 싫었다. 노동 없이 사는 나를 보고 누군가는 불공평하다고 느낄 것이다. 그럼에도 아버지는 매달 내게 용돈을 보내주셨다. 아버지의 두툼한 팔뚝과 널찍한 등짝에 대비되는 얇고 좁은 나의 몸통도 부끄러웠다.
그러나 세상이 내 안전한 온실을 찢기 시작했다. 이제부터 대학 밖으로 나가야 한다. 졸업하고 취직하고 결혼하고 육아하고 집을 구하고 노후를 준비해야 한다. 그 모든 절차가 난 두려웠다.
난 도시와 안전한 온실을 벗어나 여행을 떠나기로 결정했다. 여행은 나에게 새로운 관계의 형태를 알려주었다. 특히 우프(World Wide Opportunity on Organic Farm)라는 유기농 농장 네트워크는 내게 모험의 세계를 열어주었다. 우프에서 나는 상호호혜적인 관계를 체험했다. 여행자는 노동을 하고 호스트는 숙식을 제공한다. 그러나 이것은 고용자와 노동자의 관계가 아니었다.
농사일이 처음인 풋내기의 손은 놀랄 만큼 느리다. 가위질부터 호미질까지 하나하나 배워갔다. 체험 학습에 온 아이처럼 당근도 심어 보고 토마토에 물도 줬다. 유기농이 가지는 의미도 배웠다. 그렇게 학생이 되기도 했다가 저녁에는 마을의 손님이 되었다. 농부들이 정성스레 밭에서 키운 작물로 요리한 음식을 나눠 먹고 막걸리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눴다. 이런 관계의 형태는 내겐 충격이었다. 나는 여행을 통해 다양하고 새로운 관계의 형태를 발견했다. 이것이 바로 나에게 필요한 것이었다.
흐릿한 기억 속에서 발견한 것
우리는 경쟁 관계에 익숙하다. 입시 생활도 경쟁이고 학교생활도 학점을 따기 위한 경쟁이었고, 내가 앞둔 취직도 다시 경쟁이었다.
장수군 백화골 농장에서 운영하는 제철 꾸러미 제도는 경쟁이 아닌 협력 관계이다. 기계화된 시대에도 농부가 농사를 지으며 입게 될 리스크는 여전히 크다. 가격과 생산량은 여전히 통제할 수 없는 날씨에 맡겨진다. 이때 도시의 회원들은 연회비로 농부의 안정적인 소득을 후원하면서 그 대가로 매달 제철 채소를 제공받는다. 상자에 담긴 채소의 종류와 양은 날씨에 따라 변동된다. 농장의 꾸러미 회원들이 리스크를 나누며 농부를 후원하는 방식은 이미 10년간 이어졌다. 이러한 관계의 경험은 나에게 경쟁이 아닌 협력의 중요성을 깨닫게 했다.
그런데 나는 이것이 새로운 것이 아닌 내 과거의 기억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미 우리 할머니는 더 대담한 관계를 해왔었다. 어릴 적 내게 전라도는 많은 것을 받을 수 있는 곳이었다. 이곳에서는 칭찬도 받고, 음식도 많이 받아먹었다. 비단 가족들에게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할머니는 집을 찾은 손님들과 늘 많은 것을 나눴다. 우리 부모님은 그런 할머니에게 보고 배운 것을 자식인 내게 지금까지도 행동으로 보여주고 있다. 명절이면 집에 들어오는 많은 선물들은 그동안 부모님이 그만큼 많은 것을 사람들과 나눴기 때문이리라. 어릴 적 할머니가 나에게 가르쳐준 건 서로 나누고 함께하는 삶의 가치였다.
일본과 대만의 시골을 가다
나의 시골 여행은 장수를 거쳐 일본으로 이어졌다. 내게 익숙한 것들이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일본의 시골에서도 전라도에서 느낀 관계와 문화를 발견할 수 있었다. 일본의 농장은 협력 시스템을 통해 20년도 넘게 유기농을 유지해 오고 있었다. 또한 우프를 통해 노동력과 숙식을 교환하는 관계 또한 서로 선물을 주는 형태에 가까웠다.
전라도에 이어 도착한 일본 시골 농장에서도 같은 관계를 경험했다. 미소된장국, 낫토, 절임 음식, 다다미방. 낯선 일본 시골의 문화였지만 그 밑으로 흐르는 것은 한국 농촌의 그것과 닮았다.
대만의 농장에서도 같은 관계를 다시 만났다. 그곳에선 어릴 적 우리네 명절과 같은 시간을 보냈다. 시골집은 사촌들과 함께 밤새워 즐겁게 놀 수 있는 곳이었다. 매년 명절마다 부모님이 마련해준 어린이 캠프였다.
내가 지낸 대만의 난아오 농장은 세계 곳곳에서 매년 400여 명의 청년들이 찾는 곳이다. 그들은 함께 농사일을 하고 밥을 지어 먹었다. 그곳에서 만난 중화권 친구들은 언어와 문화가 서툰 나를 챙겨주었다. 농장 일이 끝난 후에는 그들의 집에 가서 함께 놀았다. 대만 시골 여행이 끝나는 날에는 공항까지 마중을 나와 주었다. 다음 명절에 다시 만날 것을 기대하는 마음으로 난 그들을 떠나 한국의 도시로 돌아왔다.
그렇게 여행을 하는 2개월의 시간은 내게 많은 힘을 주었다. 내게 힘을 주는 관계가 무엇인지 명확해졌다. 대가가 아닌 서로 선물을 나누는 삶을 살고 싶었다. 때마침 돌아온 서울에서 새로운 인턴 공고를 발견했다. 대기업 N사가 유기농 설문조사 인턴을 모집한다는 것이었다. 유기농 농장을 여행하고 온 나에게 큰 의미로 다가왔다.
면접 결과는 합격이었다. 전라도 농장에서 선물 받은 사과를 들고 면접을 보고 나니 나는 회사에서 사과 농장을 운영하는 청년으로 기억되었다. 시골 모험은 나를 도시의 대기업으로 인도했다. 나에게 시골은 여전히 여행이고 일탈일 뿐이었다. 도시에서의 삶이 나에겐 익숙하고 안정적이다.
그러나 내 마음 속에서는 무언가 새로운 도전이 꿈틀거렸다. 인턴 사원증을 목에 걸고 출근한 첫날에도 무언가가 다시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새로운 만남을 위해 나는 또다시 준비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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