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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 청년, 시골 모험 - 첫 번째 이야기

도시 청년, 시골 모험 - 첫 번째 이야기 - 프롤로그

 

글과 사진 / 고석수(타마) <tamakosail0205@gmail.com>

 


섬진강에서 남해바다 가는 길


2024년, 내가 살고 있는 곳은 전라남도 곡성이다. 계절마다 바뀌는 섬진강의 풍경은 이 땅의 선물이다. 섬진강이 품은 한적한 시골 마을은 하늘이 푸르다. 마을 사람들은 강에서 주워 온 몽돌로 담을 쌓았다. 돌담길을 따라 집으로 오는 길은 섬진강 냄새가 난다. 뒷산에서 흐르는 시냇물의 소리를 따라 내가 사는 시골집으로 들어간다. 

인구 3만도 안 되는 작은 시골이지만 읍내에는 KTX 기차역이 있다. 덕분에 이곳은 조용한 풍경과 달리 접근성이 좋다. 서울에서 온 손님도 많다. 일본, 대만, 중국 등 다른 나라에서 온 손님도 많다. 나는 섬진강에서 손님들과 배를 타고 노를 저어 바다까지 여행을 간다. 이렇게 어른과 어린이와 함께 모험 캠프를 열곤 한다. 

일과 놀이와 생활의 경계가 뚜렷하지 않다. 이것은 내가 원하던 다채로운 삶이다. 나는 시골집에 앉아 글을 쓴다. 온라인으로 해외 친구들과 대화하며 통번역 작업을 한다. 책상 위의 작업이 끝난 후, 함께 사는 연인과 밥을 짓고 청소를 한다. 시간은 충분하다. 여유로운 호흡으로 살아가는 생활은 충만하다. 사랑하는 사람과 살아가는 곡성 시골집의 하루하루가 감사하다.

 

구례 쌍산재에서 짝꿍이랑

 


도시에서 태어난 아파트 키즈

 

이곳은 나의 고향이 아니다. 나의 유년 시절은 시골집이 아니라 도시 아파트다. 나는 1990년 안양의 산부인과에서 태어났다. 그때는 2023년 전라남도 곡성에서의 삶을 상상할 수 있었을까. 수도권을 전전하며 살던 도시 청년은 어쩌다 여기까지 오게 되었을까. 

전국의 아파트 수는 약 1,128만 호다. (2021년 기준) 서로 닮은 천만 개의 아파트만큼 내 삶도 똑같이 쌓여가고 있었다. 수많은 도시인이 낡은 주공 아파트를 거쳐 신축 브랜드 아파트로 가는 꿈을 꾼다. 거기에서 벗어나지 못한 도시 청년의 꿈도 아파트 평수처럼 규격화되었다. 

더 높고 더 중심인 곳으로 가야 했다. 인생에서 내가 처음 만난 도전은 입시였다. 전교 200등이라는 애매한 등수는 낡고 후미진 아파트처럼 느껴졌다. 1년 365일을 독서실의 작은 책상에 앉아 있었다. 정성이 갸륵해 하늘의 신도 감동했는지 상위 0.68퍼센트 수능 성적표를 들고 난 명문대에 들어갈 수 있었다. 운 좋게 고비를 넘겼다.

 

그러나 산 넘어 산이었다. 입시 뒤에는 취업이 놓여있었다. 내가 대학에 입학하던 2008년엔 88만 원 세대 담론이 유행했고 청년 실업률은 8%를 기록하고 있었다. 기껏 올라온 산의 낭떠러지가 아찔하게 높았다. 한 번 더 정성을 쏟을 자신도 없었고 나의 신께서 다시 감동해 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리고 끝없는 고갯길이 또다시 숨 막히게 다가왔다. 취업을 넘어가면 직장이 있고, 직장을 넘어가면 결혼과 육아가 기다리고 있었다. 집과 노후를 향해 뛰어가는 게 나의 미래로 느껴졌다. 아득한 밤거리처럼 앞이 보이지 않았다. 

나는 방황했다. 하릴없이 비행기를 타고 서울 밖으로 향했다. 처음에는 그저 잠시 숨을 돌리고 싶었다. 뚜렷한 목표와 대담한 도전 같은 건 없었다. 방랑은 일탈이었다. 여전히 도시로 돌아오면 보험처럼 남겨둔 삶이 있었다. 명문대 졸업장을 얻고, 대기업 입사를 꿈꿨다. 하지만 점차 지쳐갔다. 또다시 숨 쉴 틈이 필요했다. 나는 반복해서 비행기에 올랐다.


 튀르키에 시골, 에스키쉐히르(위)  / 말레이시아 시골, 말라카(아래)

 

서쪽에서 동쪽으로 여행을 떠나다

 

서울을 떠나 처음 향한 곳은 서쪽 끝 유럽 대륙이었다.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스페인, 독일, 오스트리아. 디즈니 궁전 같은 도시를 여행했다. 믿기지 않는 포토 존이 늘 펼쳐진 장소였다.

하지만 이내 시시해졌다. 그곳엔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뿐이었다. 삶을 뿌리내리기 어려웠다. 시간이 지나면서 런던과 서울이 칙칙하게 닮아 보였다. 안개 낀 도시의 방랑자처럼 내 앞길도 어두웠다. 

많은 이들이 중심부라 여기는 유럽을 떠나 다시 동쪽으로 향했다. 이스탄불을 지나 이란으로 향했다. 중동의 시골 마을은 노란빛이 흐르고 있었다. 마을에 부는 샛노란 빛의 사막 바람이 새로운 설렘을 주었다. 그제야 난 관광이 아닌 모험을 시작하게 되었다.

 

다시 동쪽으로 향했다. 말레이시아와 베트남을 지나 중국이다. 그렇게 도착한 곳이 동아시아였다. 유럽의 성당을 지나 중동의 모스크를 만났다. 모스크를 지나자 불교 사원을 만났다. 어느새 어릴 적 뒷산에서 보았던 암자가 다시 보이기 시작했다. 여행을 하며 익숙한 것을 낯설게 바라보는 눈이 생겼다. 새로운 흥분감이 살아났다. 

동쪽으로 향하는 길은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 아니었다. 우거진 정글을 헤쳐가는 듯했다. 미로처럼 느껴졌다. 가장 익숙하게 느껴졌던 것들이 실은 가장 멀고 낯설게 느껴졌다. 같은 한자 문화권이라 생각했던 곳에서 가장 큰 문화 충격을 받았다. 서로 닮았는데 너무나 다르기 때문이다. 나에겐 일본, 대만이라는 더 가까운 나라들이 더 멀게 느껴졌다. 결국에는 제 고향인 한국의 시골들이 가장 낯설게 느껴졌다.


대만 시골, 난아오

 

동아시아 시골로 모험을 떠나다

 

2014년 스물넷 나이에 시골로 본격적 모험을 떠나기로 결심했다. 그 해 한국은 절망스러웠다. 바다에 가라앉는 아이들을 보며 일단 떠나야겠다고 결심했다. 모두 버리고 새롭게 배우고 싶었다. 3년간 한국, 대만, 일본의 시골 마을들을 여행했다. 살아갈 곳을 찾고 싶었다. 그리고 2017년부터 대만 중부의 작은 마을에 살기 시작했다. 동아시아를 오가는 삶이 시작되었다.

이 글은 20대를 거치며 겪은 10년간의 나의 모험 이야기다. 방황은 지겹게 반복되었다. 그러나 결국 성장했다. 그리고 사랑하는 연인을 만났고 가족 같은 친구들을 만났다. 도시가 가득 차 있다면 시골은 텅 비어 있다. 텅 빈 곳에서 서로를 채워가며 사랑은 가득 찼다. 

2020년에는 코로나 팬데믹이 2년간 지속되었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기 어려워진 시기였다. 그럼에도 나의 동아시아 모험은 계속되었다. 대만의 시골 마을을 뒤로 하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사실 내게 돌아갈 고향은 애초부터 없었다. 도시를 떠나고 싶었다. 강화도부터 제주도까지 걸어갔다. 다시 방황하고 성장한 시기였다. 끝인 줄 알았는데 또 방랑을 하고 또 실연을 했다. 

먼 곳을 돌아와 지금 이 자리에 서 있다. 인생은 끝없는 모험이다. 이십 대 시절의 모험과 같은 이야기를 정리하고 싶었다. 팬데믹을 겪으며 한순간에 모든 게 바뀔 수 있다는 것을 배웠다. 지금, 지나온 시간을 청산해야 한다. 이야기는 2014년 전라북도 장수에서 시작한다.

 

 

전북 장수 백화골에서 살 때의 모습과 백화골 풍경을 담은 그림


젓는 사람
곡성에서
쓰시마까지 저어갑니다

걷는 사람
볼음도에서
만주까지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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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부터 기대되는 타마의 이야기는 계속 이어집니다. / 월간광장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