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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을 농촌유학 보내며 / 시골아들의 도시엄마

아들을 농촌유학 보내며


시골아들의 도시엄마

 

내가 겨우 열 살 남짓 소녀였을 때, 우리가 늘상 작당하며 놀던 산길을 지나면 들판이 나오고, 이윽고 논이 나오면 저만치 앞에 아름드리 큰 나무 한 그루가 있었다. 무슨 나무였는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언제나 멀리서도 보이는 그 나무가 하루는 온통 하얗게 꽃으로 뒤덮여 있었다.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뜨고 쳐다보니, 나뭇가지도 잎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하얗게 나무를 감싸고 있던 것은 수십 마리의 백로무리였다. 

숨이 멎을 것 같았던 그 아름다운 풍경은 어린 나에게 알 수 없는 평온함을 느끼게 해주었다. 지금도 마음이 힘들 때면 책상에 엎드려, 또는 벽에 기대어, 또는 잠깐이라도 눈을 감고, 고요하게 앉아있던 그 백로무리를 떠올린다. 내 인생에, 언제든지 꺼내볼 수 있는 아름답고 고요한 쉼을 선물한 신께 감사드린다.

 

학교폭력 때문이라며 방과 후 운동장에서 노는 것조차 전면 금지한 아이의 학교 방침 때문에 지난해 고민이 많았다. 아이에게 몰래 놀아도 된다고 했더니, 놀다가 선생님께 잡힌 친구들이 반성문을 썼다고 한다. 아들은 혼날까 무서워 일탈(?)도 해보지 못했다. 광클릭을 해서 겨우 들어간 방과 후 수업을 채우고 남는 시간은 피아노 학원으로 메꿨다. 친구들이랑 어울리는 것이라고 해봐야 편의점에서 군것질이나 하다 집에 오는 게 고작이었다. 

 

지루하고도 지루해 보이는 초등학생의 일상에 변화를 주고 싶었지만, 퇴근하면 저녁마다 완전히 녹초가 되어서 뛰어 들어와 저녁 식사를 차리고 나면 나 역시 기운이 하나도 없었다. 매일 저녁 책 읽어주던 시절이 지나 보드게임을 지나, 바둑 두는 나이가 되니 마주 앉은 내가 자꾸 꾸벅꾸벅 졸아서 아이는 삐치기도 했다. 바둑은 인간적으로 너무 졸립다. 그러다가 컴퓨터 게임의 세계를 열어줬더니 이제는 같이 놀자는 말도 안 한다. 

 

생각 끝에 올해 아이를 산골로 유학을 보냈다. 언젠가 들은 농촌유학 프로그램을 눈여겨봤었는데 마침 좋은 학교를 찾았다. 이제 아이는 친구들과 농가에 살면서 마을 어르신들과 청년들이 함께 돌봐주는 산골 마을에 살면서 전교생이 45명인 (폐교 위기를 넘긴 공립) 초등학교에 다닌다. 전교생의 절반은 도시에서 유학 온 아이들이다. 

 

이제는 일주일마다 주말에만 아이를 만난다. 떨어져 지내다 만나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그사이에, 아이가 홀로 겪은 새로운 도전들이 이야깃거리가 된다. 아빠랑 얘기할 때는 시골살이가 꽤 재미있다는 듯하더니만 엄마가 안아주니 눈물을 훌쩍거리며 가족이 보고 싶었단다. 당연하지. (내 새끼..ㅠ)

 

아침이면 산언덕에서부터 개 두 마리와 친구들하고 걸어서 학교에 간단다. 가는 길에 마을 농가의 친구들과 동생들을 만나 삼삼오오 무리를 지어 농로를 걸어 이윽고 학교에 도착한다. 학교 가는 길에 고양이도 만나고 거위도 만나고 동네 어르신들도 나와서 지나가는 아이들을 바라보신다고 한다.

멀리 펼쳐져 있는 산등선을 보며 우리 아들도 평생 간직할 아름다운 장면 하나만이라도 새길 수 있게 된다면 나는 감사할 따름이다. 

산골마을로 유학을 간다고 하니 서울 친구들이 우리 아들에게 “너는 지금도 공부 못하는데 거기 가서 더 바보 되면 어떡할래?”라고 했단다. 친구들의 말을 나에게 무덤덤하게 전한 아들에게 “글쎄다. 네가 공부를 잘할지 어떨지는 나도 모르겠지만, 네가 황금 심장을 가진 것만은 확실해. 그게 훨씬 더 멋져. 걱정하지 마”라고 해주었다. 

이제 겨우 10살이 된 아들의 농촌 생활을 응원 또 응원한다.

 

글 / 이승윤 (중앙대학교 사회복지학과 교수)